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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청년자원봉사 2015의 시작을 옹달샘과 함께 했던 전탄성이라고 합니다.
저는 저희 이모의 소개로 옹달샘을 알게 되었고, 신청 페이지에서 자기소개를 쓸 때까지만 해도 ‘그래, 딱 한 달만 떠나 있자! 가서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는 곳에서, 공기 좋고 물 좋은 산 속에서 좀 쉬다 오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학교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휴학한 상태에서 진로와 인생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그리고 뜻하지 않은 가족 간의 불화로 인한 상처를 껴안고 옹달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자원봉사 합격 전화는 너무나도 반가웠습니다. 막상 들어갈 날이 가까워져오니 싱숭생숭 하던 마음은 옹달샘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바뀌어 당일에는 살짝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처음 가는 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처음 하는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힘들었던 상황 때문이었는지 처음 며칠은 시간이 정말 느리게 지나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밝고 맑은 옹달샘의 자연 속에서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으며 하루하루 달라져만 갔습니다. 처음에는 어렵고 아픈 약자들을 돕는 일도 아닌데 이게 왜 봉사활동이지 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지만 나를 낮추고 서번트쉽을 몸소 체득하자는 마음을 가지고 나니 그때부터는 자연스럽게 남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을 위해 나를 낮추면서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도 조금은 편해졌습니다. 어제와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순간을, 오늘을 의미 있게 보내고자 했습니다. 지난날의 힘들었던 일들을 더 이상 힘들게만 받아들이지 않고, 피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보고 생각하고 이겨내고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자봉 동기들과 아침지기님들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편견 없이 바라봐 주었고, 극복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었습니다.
오롯이 나를 생각한다는 것은 참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한 달 동안, 군대에 있었던 22개월보다 더 깊고 진하게 나에게 집중 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과제와 스펙 전쟁에 치여 취업만을 바라보고 살던 와중에 내 마음의 소리를 언제 들어보겠습니까? 그렇게 나를 더 음미하고 조금씩 치유해가며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마지막 주에는 2분 스피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동기들과 많은 이야기도 나누며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더 객관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콘서트를 했던 것은 제 인생에 있어 정말 경이로운 순간의 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의 내 인생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남은 날의 꿈에 대해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진심어린 응원과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벅찬 순간이었는지..아직도 그 순간, 순간들이 가슴 속에 생생합니다. 그 시간, 그 공간, 그때의 마음들, 힘들 때마다 꺼내어 보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잊지 못할 추억과 마르지 않는 밝은 에너지의 옹달샘을 안겨준 우리 청년자봉동기들과 모든 아침지기님들께 감사의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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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생활을 하면서 놀기도 많이 놀고 공부도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며 다양한 경험을 해왔다. 이번 겨울 방학 때는 무슨 일을 하며 보낼까 고민하던 참에 부모님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옹달샘 청년자원봉사였다. 내가 그동안 생각했던 자원 봉사와는 다른 유형의 봉사였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특수 봉사도 아니었고 행사를 기획하고 만들어 나가는 역할도 아니었다. 청소, 식사 세팅, 잠자리 세팅 등 그야말로 옹달샘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섬기는 서번트십 함양을 목적으로 하는 봉사였다. 처음에는 집에서도 잘 안하는 이런 일을 굳이 충주까지 가서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어차피 이 봉사를 하지 않으면 그 시간에 집에서 빈둥거리면서 방학을 덧없이 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바쁜 일상 속에서 내 몸에는 휴식을 준 적이 많은데 내 마음에게는 진정한 휴식을 주지 못하고 간과하며 살았다. 그래서 사실은 옹달샘에서의 자원봉사가 내게는 마음이 쉴 수 있는 힐링 타임으로 다가왔다.
홈페이지에 자원봉사에 대한 정보들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무엇을 챙겨야하는지 어떻게 옹달샘으로 들어가야 할지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옹달샘에 도착하여 보니 모든 분들이 참 반갑게 맞아주시고 자봉들의 의견도 존중하며 일정에 반영해주셔서 편안한 마음으로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첫 날 웰컴센터에서 나와 함께 한달 동안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게 될 2명의 동료들을 만나게 된 때의 떨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참 긴 것만 같이 느껴졌는데 참 좋은 동료들을 만나 서로의 삶을 나누고 일상에서의 즐거움을 함께하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새벽부터 밤까지 나눔의 집과 꿈다실을 오가며 동료들, 옹달샘 식구들과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웃음들이 아주 소소하지만 충만한 행복으로 내 안에 자리 잡았다.
2015년을 시작했던 청년 자원봉사는 지금까지의 나, 지금부터의 나를 다시 돌아보고 사색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2분 스피치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 자신의 아픔이나 꿈, 목표들은 어쩌면 아주 개인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옹달샘에 온전히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옹달샘에서 마주한 맑고 깨끗한 환경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의 마음들이 내가 나를 드러낼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 주었다.
한 달 간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또 줄 수 있었다. 좋은 인연을 만났고 좋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실생활에서부터 인생에 있어서의 큰 조언들도 얻을 수 있었다. 깨끗한 자연과 아름다운 사람들 덕분에 몸도 마음도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고 행복했다. 2015년 1월 청년자원봉사 동안 함께했던 모든 분들......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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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편지를 통해 청년자원봉사를 알게 되었을 때, 솔직히 봉사에 대한 관심보다는 호기심이 먼저였던 것 같다. 하루 이상 한 곳에 머물며 봉사를 해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원봉사를 하게 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가는 날까지 설렘과 기대감으로 보냈는데 막상 옹달샘에 도착한 첫 날엔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낯선 곳에서 한 달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잘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거기에는 내가 떼놓지 않고 살아왔던 TV, 컴퓨터, 간식 없이 한 달을 잘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 만에 이 걱정들은 다시 기대와 설렘으로 바뀌었다. 작은 화면들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그것들과 멀어지면서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게 되었다. 작은 것에도 관심이 가고, 좁은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참 큰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난 한 달은 두꺼비에게 헌 집을 주고 새 집을 받은 것 같은, 내가 나눈 것에 비해 받은 것이 많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봉사를 하면서 더운 날씨 덕에 땀 흘려도 함께하는 즐거움에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았다. 땀으로 몸은 찝찝해도 마음은 깨끗해지는 순간들이었다. 내 몫을 내가 제대로 해내는 것이 다른 이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배려'임을 몸소 느꼈다. 다른 이가 더 열심히 하면 내가 조금은 더 편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누군가가 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보다는 그 '누군가'가 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매 순간 되새기는 내 모습이 조금씩 성장해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자봉들, 아침지기 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본인의 마음 속 깊이 담아두었던 진솔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어서 그 용기에 감동받고 고맙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를 좀 닫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먼저 다가가는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된 시간이기도 했다. 이런 대화의 시간을 통해서, 한 사람의 좋은 에너지가 다른 이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나도 그런 좋은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분 스피치를 하면서 '꿈'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꿈에 대해 진지하게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 살면서 거의 없었는데, 꿈을 꿀 수 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것에 벅찬 기분이 들었다.
칭찬프로그램을 했을 때, 나는 칭찬을 하는 것보다 받는 것이 힘들었다. 그 힘듦은 칭찬을 듣기에 내가 부족한 사람인 것 같아 민망했다는 뜻이다. 박수와 칭찬은 나에게는 스스로에 대한 인정과 발전을 도모하게 되고, 누군가에게는 힘을 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이기에 다른 이를 칭찬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고, 나 또한 칭찬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겠다고 다짐도 해본다.
내가 몰랐던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졌던 한 달 이었다. 몰랐던 사람들과 몰랐던 장소, 해보지 않았던 일들. 그만큼 다양했던 경험들을 통해 많이 배우고 성장한 내가 되지 않았나한다. 무기력하던 내 인생에 새로운 자극이 된 감사한 시간이었다.
아침지기 분들께서 좀 더 알찬 시간이 되라며 매주 미션을 주셨는데, 그 중 하나가 새로운 도전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나에겐 옹달샘 자원봉사도 하나의 도전이었다. 세상에 발 내딛는 것에 용기가 부족했던 내가 도전이라는 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의 특권임을 알게 되었다. '옹달샘'이라는 특별한 도전의 기억을 잊지 않는다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수많은 도전 앞의 두려움을 잘 극복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새삼 이런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던 것이 행복하게 느껴진다.
나에게 이런 좋은 추억을 안겨준 옹달샘의 겨울은 어떠할까. 추운 날씨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외투를 챙겨 입고 일하러 가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재미있다. 겨울에 또 자봉을 하러 가고 싶다. 그 때는 내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많은 시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 겨울까지 더 유쾌하고 좋은 에너지를 뿜는 사람이 되어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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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간의 자원봉사를 마치며…
안녕하세요 19기 자원봉사자 정보선 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권유로 꿈 너머 꿈 청년학교를 신청하려고 했는데 제가 계획한 기간 중 해당 프로그램을 찾지 못하고 대신 청년자원봉사를 모집하는 것을 보고 신청하여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곳에 선뜻 지원한 동기는, 옹달샘은 명상센터이므로 제 스스로의 자신감 회복과 감정적인 휴식이 목적이었습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의 느낌은 ‘이런 사회와 분리되어 있는 곳에서 한 달을 무사히 버틸 수 있을까’와 ‘자원봉사 인원이 많아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자원봉사 인원을 보고 내성적인 성격을 고쳐보자는 목표도 설정했는데 생각보다 잘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걸음 앞으로 내디뎠다는 생각이 들고 차근차근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고 조바심 내지 않는다면 느리지만 확실히 발전할 것이라 믿습니다.
한 달여 간의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라면 단연 2주차에 꿈을 찾을 때 억눌러왔던 감정과 생각들이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의외로 누군가에게 말하고 나니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지만 저를 짓누르던 기억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졌고, 제 자신의 일을 제 3자의 눈으로 보는 느낌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전보다 가벼워진 기억의 무게에 살아갈 용기의 싹이 트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한달 후의 저의 모습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변하기 위하여 한 달이라는 시간은 짧다는 것을 알고 있고, 적지 않은 발전이 있었기에 행복합니다.
겨울방학에 또 오고 싶다는 동기들도 있고 언제든 또 오고 싶다는 동기들도 있지만 이번 여름방학이 저로서는 사실상 마지막 방학이어서 또 오겠다는 기약을 할 수 없어 아쉽습니다.
하루짜리 자원봉사자가 필요할 때라면 언제든 다시 이곳에 와서 도움이 되고 싶고, 그 때엔 시간이 지난 만큼 더욱 발전된 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많고 많았던 헛되었던 방학들과 같아 질뻔했던 이번 방학이 자원봉사로 인해 큰 추억이 되었고 큰 의미가 되었습니다. 분명 지금 느끼는 이 아쉬움도, 한 달여 간의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고 희미해지겠지만 힘들 때면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이 꿈 같은 한 달간의 기억의 작은 파편이 다시금 제게 활기를 불어 넣어주고 용기를 줄 것이기에 마음을 다 잡고 기쁜 마음으로 다시 세상을 향해, 제 꿈을 향해 주저 없이 나아가려 합니다.
한 달간 함께 했던 모든 분들께 진심을 담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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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옹달샘에 1박2일로 동생과 자원봉사를 하러 왔었다. 아버지의 소개로 아침편지를 받아보던 중이었다. 아침편지를 통해 옹달샘을 알게 되었는데 내 마음에 울림을 준 키워드는 명상과 건축이었다. 특별히 잘 알고 있는 분야는 아니지만 늘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면서 더욱 알아가고 싶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건축학교나 다른 명상 프로그램의 참여를 망설이던 중 자원봉사자를 구한다는 이메일이 나에게는 하나의 기회였다.
그리고 이틀은 금방 지나갔다. 내가 이곳에서 도운 일들은 그저 작은 것들이었기 때문에 거창하게 무엇을 배웠다고 할 만한 것이 없었고, 명상이나 건축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그렇지만 평소 나의 일상과는 다른 공간, 다른 분위기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그 모든 새로운 대기를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이 행운이었고 감사한 일이었다. 사진에서만 보던 건물들을 직접 와서 보고 만져보고, 이른 아침 부산한 새소리에 잠을 깨던 것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더불어 새벽산행에서 보았던 충주시 그리고 그 너머의 풍경이 내게 전해주던 전율, 그것이 나로 하여금 다시 이곳을 찾게 만든 이유가 아닐까.
다시 찾은 옹달샘.
그동안 나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처럼 이곳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노은에서 옹달샘으로 난 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서부터 새로운 건물을 만나볼 수 있었다. 아직은 추운 겨울인 것 같기도 하고 겨우 봄이 올 것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어떤 기대와 설렘만큼이나 묵직한 공포와 두려움이 존재한다. 물론 나는 이곳에 두 번째 오는 것이긴 했지만, 장기간 집을 떠나 낯선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마음에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이 자연스레 지워질 만큼 나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점차 즐거워졌다. 감사하게도 너무나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매 순간을 웃음으로 채울 수 있었다.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린넨실에서 빨래를 개고 다락방에서 방청소를 했던 시간들이 때때로 회의감이 들만큼 피로한 날도 있었지만, 숙소에서 또는 카페에 모여 함께 얘기하고 격려해주었던 자원봉사자들ㅡ맏언니 진희님, 진지한 혜진님, 우리 총괄 진영님, 그리고 처음 온 우리들에게 많은 일들을 가르쳐주었던 은희님, 창섭님ㅡ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날들이었다.
다락방 청소를 마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중에 모처럼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잠깐 휴식을 취하던 어느 오후 한 때. 나는 저 멀리서 살그머니 다가오는 봄을 만났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 선 지금, 계절의 흐름을 이렇게 체감할 수 있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 그 바람과 그 햇살을 맞으며 옹달샘 전경을 바라보았다. 나는 굳이 떨쳐버릴 잡념도, 해결해야할 고민도, 정리해야할 생각도 없이 이곳에 왔다. 그보다 옹달샘 자원봉사는 나에게 하나의 도전이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도전에서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이곳에서 나는 설거지나 청소도 도왔지만 명상 프로그램도 직접 체험할 수 있었고, 링컨학교 프로그램(꿈너머 꿈 특강, 게티즈버그 연설 특강, 칭찬놀이, 2분 스피치 콘서트 등) 에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더구나 새와 나무들, 녹아드는 샘과 별이 가득한 밤하늘, 사랑과 감사의 말들을 떠올리면 내가 이곳에서 얻은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많은 것들 중에서도 내가 특별히 체감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함께’의 가능성이다. 어쩌면 ‘함께’라는 이 말이 내가 얻은 수많은 것들을 총칭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주로 혼자 시간 보내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누군가와 무엇을 함께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많지 않았고, 그런 생각 자체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무슨 일이든지 여러 사람들이 함께 했는데, 상대방을 신뢰하고 배려하는 마음만 있다면 혼자서 할 때보다 더 큰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으로 깨달았다. 그 즐거움을 아마 혼자서는 알기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봉사활동을 마치는 마지막 주 월요일 아침에는 간단히 청소를 마치고 혼자 웰컴센터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건양링컨학교 학생들의 명찰을 테이블 위에 가만히 늘어놓으며 혼자 있지만 왠지 혼자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건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하는 일의 일환이라고 좀 더 크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은 아닌지. 웰컴센터 안내데스크 위에 있는 램프가 고요하게 향기를 불러일으킨다. 세상에는 그 자체만으로도 환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많지만 그것들이 다른 사람에게 가닿았을 때 이는 파장은 유쾌한 에너지를 더욱 많이 발산하는 것 같다. 나 또한 항상 혼자인 상태를 고수하기보다는 그 유쾌한 파장의 근원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이루어나가는 깊은산속 옹달샘의 무한 에너지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되고 내 마음의 쉼터가 되어주는 이곳에 내가 도울 수 있는 작은 일이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돕고 싶다. 가까이서 좋은 말씀 많이 들려주시고 우리들을 챙겨주셨던 아침지기님들께 장황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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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앞에는 무당벌레 한 마리가 있다.
창문을 향해 날갯짓 하지만 이 녀석은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혼란스러운 듯 창문 주위를 오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날개를 크게 펼쳐 보인다. 마치 “이런 있으나 마나 쓸모없는 날개!!” 하고 화를 내는 것만 같다. 창문을 뚫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녀석은 이제 창문을 타고 오르기 시작한다.
무당벌레를 보며 참 나랑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외적으로 화려 할 나이. 오랜 시간 애벌레로 있다가 드디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가 생겼는데, 이걸 어떻게 써야 할 지 방법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창문이라는 큰 벽에 가로막힌 꼴이 꼭 내 모습 같아 보였다. 처음 옹달샘의 문을 두드리며 자기소개서를 쓰던, 충주 버스터미널에서 1시간 동안 앉아 ‘내가 여기서 뭐하는 거지? 그냥 다시 돌아갈까?’ 생각하며 나를 시험하던 그 때의 내 모습이었다.
내가 옹달샘에 온 이유는 도피를 빙자한 ‘꿈과 자아 찾기’였다. 학창시절 내내 나는 디자이너를 꿈꾸었다. 그러나 실기고사 기간 동안, 지금 까지 꿈꾸고 달렸던 디자이너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입시 결과는 참담했다. 5전 5패. 아픈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재수생이 되어 다시 시작했다. 목표 이하의 성적으로 겨우 점수 맞추어서 소위 ‘돈 많이 버는 직업군’에 취직할 수 있는 금융경영학과로 진학했다. 대학에 가면 다 잘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전공수업과 학교생활을 하면서 입시준비를 하던 때 보다 더 큰 혼란에 빠졌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도 아니고 심지어 지금까지 해오던 것과 정 반대의 것을 하니 숨이 막히고 겁이 났다. 자연스럽게 전공과 학교에 애착이 가지 않았고, 늘 겉돌기만 했다. 말 그대로 나는 ‘아웃사이더’였다. 내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앞만 보며 잘 달려가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한 걸음 떼는 것이 무서웠지만, 어쩔 수 없이 같이 달렸다. 더 뒤쳐질까봐 무서웠다. 그러나 노력과 반비례되는 성적과, 바닥을 뚫고 내려간 학업에 대한 의욕에 나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고, 결국 몸도 마음도 탈이 났다. ‘그래도 해야만 해.’, ‘넌 이미 1년 늦었어.’, ‘너 때문에 부모님 고생 하시는 거 안 보여?’하는 생각에 나는 내 자존감에 상처를 내고 있었다. 결국 나는 내가 누군지 알아 볼 수 없는 정도의 피투성이, 상처투성이 미아가 되어 있었다.
계속해서 몰아붙이면 큰 일이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달리던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더 이상 내가 가고 싶지 않은 길을 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떼고 달려야 할 곳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생각을 너무 급하게 한 탓에 나는 더 머릿속이 복잡해졌고 엉킬 만큼 엉킨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옹달샘을 찾았다.
옹달샘에서의 일들은 말 그대로 궂은 일. 가장 아래에서 타인을 편하게 하기 위해 하는 일들이었다. 각오하고 왔기에 망정이지 아무 생각 없이 왔었다면 큰 코 다칠 뻔했다. 처음 하는 일에 몸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순간이 너무 즐거웠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말 거는 것을 두려워했던 내가 먼저 손님들께 웃으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자원봉사자 중 유일하게 카페를 전담으로 맡았는데, 그 안에서 나는 지금까지의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인가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옆에서 같이 손잡고 ‘으쌰으쌰!’ 하는 우리 자원봉사자들, 앞에서 뒤에서 끌고 밀어주시는 우리 아침지기님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변화였다. ‘유쾌한 에너지’로 돌아가는 옹달샘에서 어떻게 변화하지 않을 수 있을까. 힘내지 말라 해도 자연스럽게 힘이 날 수 밖에 없는 이상한 기운과 환경이 내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한 달도 채 안돼서 내 생각이 변하고, 내 자신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환경에서 일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즐거워서 처음에는 옹달샘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 같았던 꿈이 다시 내게 생겼다. 아니, 어쩌면 꿈보다 꿈 너머 꿈이 먼저 생겼다는 게 맞을 지도 모른다. 내게 다시 생겨난 그 것은 바로 ‘아침지기’가 되어 다시 이곳에 돌아오는 것이다. 이곳에서 꿈을 찾아 방황하고 상처에 두려워 꿈꾸길 거부하고 제자리에 서 있는 또 다른 무당벌레. 또 다른 나 자신들에게 꿈을 향해 한 걸음 내 딛을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포기에 길들여진 나를 조금씩 변화시킬 것이다. 유리창 너머의 세상으로 도약 할 수 있도록 더 이상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날개가 있는 것’들은 한 번 날기 위해 수백, 수 천 번의 날갯짓을 해야 한다고 한다. 벼랑에서 떨어져도 다시 일어나 날갯짓을 해야만 비로소 ‘비상’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계속 노력할 것이고 다시 이 자리에 아침지기로 올 것이다. 이제 나는 옹달샘 밖에서의 내가 기대된다.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아졌고, 내가 분명히 하고 싶은 ‘유일한’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까 그 무당벌레는 보이지 않는다. 시야에서 멀어진 걸 보면 누군가 나간 틈을 타서 따라 나갔거나, 힘들어 잠시 쉬고 있거나, 아니면 계속 유리창을 오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확신한다. 그 녀석은 언젠가 이 밖으로 나갈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젠 내가 세상 밖으로 나가 ‘비상’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옹달샘에서 봉사하고 싶은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힘들어도 즐기라고.
세상 어디에서 느낄 수 없는 이 유쾌한 에너지와 옹달샘의 자연을 몸 한가득 느끼라고.
그리고 그렇게 하나하나 즐기다 보면 어느새 지금의 봉사는 타인을 위한 봉사가 아닌 나를 위한 봉사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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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기 청년자원봉사 김연주입니다.
작년 11월에 시작된 옹달샘에서의 인연은 해가 바뀌고 봄이 코앞인 지금까지도 닿아있는 듯합니다. 4년 정도 사회생활을 하다 1년간 호주를 다녀오고 채 열흘이 지나지 않아 옹달샘에 오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는 말은 제 선택에 확신이 없을 때 마다 되뇌이는 말입니다. 옹달샘에 오기 전날도 그랬습니다. 딱히 이곳에 오게 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였습니다. 평소부터 하고 싶었던 것이고 마침 여건이 되어 신청을 했고, 12기 자봉이 되었습니다.
옹달샘에서 만날 새로운 인연들, 생활들이 설레였고, 이 경험과 인연들이 제 인생에 또 어떤 밑바탕으로 쓰여질지 기대되었습니다.
매일같이 쪽지로 사랑을 전하시던 은희님, 옹달샘의 유리알 창현님, 그리고 저, 이렇게 세 명이 12기 자봉이가 되었습니다. 아침을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하루는 오전엔 그날 프로그램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오후엔 꿈꾸는 다락방을 청소하는 것이 자봉의 주된 일이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재미있었던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옹달샘에서 제 평생 처음해본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김장입니다. 그냥 김장이 아닌 천포기 김장!!!!!!! 그날따라 날씨는 또 왜그리 추웠을까요. 식탁 네 개를 한 줄로 붙여 절인 배추를 치대고 있는데 창 너머에 희뿌연 뭔가가 소복이 내렸습니다. 눈이다!!! 아직도 그 순간을 생각하며 눈을 감으면 그 자리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진한 고춧가루 냄새, 하얗고 깨끗한 눈, 옹달샘에 계신 모두와 모여앉아 함께 했던 김장.. 정말 인상적 이였습니다.
맛있는 저녁식사와 설거지가 끝나면 자봉의 하루 일정도 끝나게 됩니다.
하루가 끝나면 찾는 두 곳이 있습니다. 카페와 도서관입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를 마친 후,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정말 달콤하답니다. 서로 장난을 치기도 하고, 꿈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마음속의 고민을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은희님, 창현님과 저는 마음을 나누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차 한 잔을 나누고 나면, 벽면 가득 빼곡히 책이 있는 도서관으로 갔습니다. 읽고 싶은 책이 얼마나 많았는지 다 읽으려면 하루에 한권을 읽어도 모자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정리하곤 했었습니다.
이주정도 지났을까요?
고도원 이사장님의 꿈너머 꿈 강의를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1시간이 10분 같았습니다. 제 꿈에 확신이 섰고, 나만의 꿈이 사회를 위한 꿈으로 증폭되었습니다. 이제 앞만 보고 달리면 되겠구나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 꿈이 흔들리기 시작했었습니다. 힘들었지만 배운것도 많았습니다.
특히, 링컨학교는 아이들을 대하는 직업을 가진 저에게 천금 같았던 시간 이였습니다.
자원봉사기간이 끝나갈 무렵, 링컨학교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총 세 번의 링컨학교에 참가하였습니다. 2기때는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이 너무 즐겁고 행복해서 빨리 일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3기때는 그 아이들에게서 저를 보았습니다. 저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4기때는 13조의 담임쌤이 되었습니다. 맘껏 사랑하고 넘칠 만큼 사랑받았습니다.
6박 7일 동안 아이들은 자신만의 2분 스피치를 만듭니다. 어떤 아이들은 아픔을 드러내는 용기를 보여줬습니다. 그런 용기에 형제, 자매들은 응원과 지지를 보내고 공감하며, 못다 꺼낸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어 놓았습니다. 속으로만 삭히고 감추었던 이야기를 서로가 서로를 믿고 풀어내며 자신의 아픔을 극복하고, 타인의 아픔을 감싸 안았습니다.
링컨학교라는 공간의 힘, 아침지기, 고도원 님이라는 사람의 힘, 절대 긍정이라는 마음의 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변화되고, 치유되어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 역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링컨학교 4기 이시은 학생의 2분 스피치 중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함께하고 있는 이 순간이 위대한 역사가 될 것입니다.’ 위대한 역사가 될 이곳에서 잠시나마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한 시간들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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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인연만큼 신기한것이 있을까?
책 한 권에서 시작된 인연이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에서 몇 개의 점이 되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졸업만을 남긴 채 본가인 부산으로 내려와있던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예전부터 명상을 좋아했기에, 나는 명상으로 해답을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명상을하려고 해도 잡념이 계속 방해해서 집중이 되지 않자 코이케 류노스케의 생각 버리기라는 책을 찾아 보게 되었다. 담담하게 써 내려간 류노스케의 책을 보면서 그 작가에게 무엇인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류노스케에 대해 알아가던 중, 그가 2011년 2월 18일자 MBC스페셜‘마음의 근육을키우다’편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2011년 10월 6일, 나는 MBC스페셜에서 깊은산속 옹달샘의 존재를 알았다.
고도원의 아침편지라는 것을 겨우 스쳐 들었던것이 전부였던 나에게 깊은산속 옹달샘은 너무나 생소한 곳이었다. 그러나 MBC스페셜에 나오는 명상 프로그램들과 고도원 이사장님을 보면서 왠지 모를 끌림을 느꼈다. 명상을 좀 더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에 깊은산속 옹달샘 홈페이지를 찾아보게 되었고, 그 곳에서 청년자원봉사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 청년자원봉사 배너를 보고 이유 모를 전율을 느꼈다.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것을 신청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로 거의 한달 정도는고민 했다. 졸업만을 앞둔 시점에서 이것보다는 다른 것에 힘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취직을 위해서는 회사나 사회가 요구하는 영어와 스펙에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다른 무슨 일을 해도, 나의 마음은 한 구석에서 이 자원봉사를 꼭 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결국 부모님과 상담한후에 2011년 11월 초에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신청할 때 신경 쓰이던 것은 다른 청년봉사자들보다 1주일을 더 한다는 점 이었다. 혹시 힘든데 한번 들어갔다 다시 나오기 힘든 것은 아닐까? 혹시 무슨 종교 행위나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시키는 것은 아닐까? 온갖 걱정들이 나를 괴롭혔다. 걱정들을 뒤로 한 채로 신청 버튼을 누르고 나니, 이번에는 메일 답장이 오지 않아 초조해졌다. 겨우 하루나 이틀 지났을 뿐인데, 스스로 왜 이리 답장이 안 오지? 내가 탈락한 건가? 이 프로그램에서 탈락하면 무엇을 하면서보내지? 하면서 조급해했다. 그리고 조급함이 극에 달했을 즈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며칠까지 자원봉사 하러 옹달샘으로 오라는 전화였다. 정말 기뻤다. 하지만, 또 잡념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괜히 신청 한 건 아닐까? 수많은 걱정들을 안은 채 결심을했다. 이왕 된 거 잘 갔다 오자고.
2011년 11월 16일에 처음 왔을 때는 정말 어색했다.
충주 시내에서 꽤나 거리가 있는 곳이었고, 주변에는 정말 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한달 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에 약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나를 맞이하러 와주신 아침지기 송미령님의 친절함과 모두의 따뜻한 관심에 약간씩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일 자체는 쉽지 않았다. 처음 맛보는 옹달샘의 분위기에 적응도힘들었다. 설거지를 하다가그릇을 깨뜨려 자원봉사 한달 연장하라는 장난(?)도 받아 보았고, 일이 힘들어 다음날 몸살이 나 혼자 쉬는 바람에 다른 자원봉사자 분들께 폐를 끼치기도 했다. 그러나, 아침지기 고대우님이 왜 이곳에 오게 되고, 꿈에 대해 물어봐 주셔서 옹달샘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의의를 스스로 생각해 보면서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힘든 점을 계속 물어봐 주고, 같이 음식도 먹으러 가고, 아침지기 분의 집에서 잠자기도 하고, 여러 가지 볼거리도 많이 보면서 자연스럽게 옹달샘에 녹아 들게 되었다.
일이 쉬워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겨울맞이 김장이었다.
몇 포기를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말 녹록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배추를 옮기고 절이고 양념을 하면서 어머님들이 얼마나 대단한 지를 새삼 깨달았다. 도중에 점심시간이 되어 시간이 났다. 나는 힘이 들어 방에서 잠시만 누워있을 생각이었는데 어느덧 쓰러져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니 1시간 이상 지나 있었다. 몸은 아팠지만 그대로 몸을 일으켜 일을 하러 갔다. 그리고 끝날 때까지 열심히배추와의 사투를 벌였다. 드디어누군가가 끝났다고 선언한 순간, 정말 기뻤다.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정말로 기뻤다. 당분간 김치가먹기 싫을 정도로 김장이 힘들었기에, 그 후에 하는 웬만한 일들은 우습게 보이기 시작했다.
프로그램 중에서 감명 깊었던것은 뇌마사지였다.
그때 나는 동기 자원봉사자인 연주님과 함께 짝을 지어 진행했는데, 뇌마사지를 받을 때 매우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연주님은 나에게 뇌마사지를 해 줄 때 잠깐 울컥했다고 하셨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연주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가지고, 자원봉사자들의 파트너 십도 더욱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동기인 은희님의 도움도컸다.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일하는능력은 오히려 나를 능가하고 있었고, 의욕 또한 높았다. 모두에게 다가가는 스스럼없음 덕분에 나도 그 분위기를 타고 옹달샘에 점점 더 적응할 수 있었다. 언제나 은희님의 밝은 성격 덕분에 힘들다고 생각되던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매일매일을 밝고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었다.
옹달샘 청년자원봉사 12기는 그래서,
열심히 일하면서도 서로를 보살펴주고 일의 역할분담이 잘 되며 손발이 잘 맞는, 뭔가 애틋한 기수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였을까? 처음 1개월도길다고 생각했던 나는 어느덧 연장을 신청해서 2개월을 넘기고 있었다.
사실 도중에 휴식을 겸해서 부산에갔다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옹달샘과 타 단체와의 친선 축구시합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시간에맞춰 나는 충주에 도착하기로 하였다. 충주에 도착하자마자 옹달샘의 축구 선수로 차출(?)당한 나는, 시합을 하기로 한 그라운드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장시간 버스를 탄 피로감 때문 이었을까? 나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몸을 풀면서 가볍게 공을 차다가슛을 하려고 발을 내디뎠는데, 오랜만에 신은 축구화 때문인지 발을 잘못 내디뎌 발목이 꺾여 버린 것이다. 정말 아팠다. 너무 아프면 신음이 아니라 웃음이 나온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다고 판단되어 나는 그라운드를 누비는 대신 골대 앞에서 가만히 서있는 골키퍼를 했다. 하지만, 조금만뛰어도 아팠다. 그날 저녁, 나는 부상당한 채로 옹달샘에 들어갔다. 부상의 심각성을 모른 채 다리를 절뚝거리며 2주간 자원봉사를 했지만, 우연히 간 정형외과에서 부상의 심각성을 말해 주고는 절대안정을 권했다. 덕분에 부산으로 내려가 2주간 쉬었다. 사실, 그대로 부산으로 내려갈 수도 있었지만, 다시 옹달샘으로 올라왔다. 아마도 스스로 정한 기간(연장한기간이지만)을 채우고 내려 오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원봉사자로서의 생활은 즐겁고 행복했다.
자원봉사 기간을 더 늘릴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혼란스러웠다. 일이 익숙해지는 것 외에는 1개월 때나 2개월 때나 별 차이가없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일은 반복되지만 들어갈 수 있는 프로그램은 한정되어 있어서 새로운 경험을 쌓을 만한 계기가없었던 것이다. 자원봉사자로서의 한계를 느낀 나는 2개월 정도의자원봉사 생활을 마치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부산에 내려와서 일을 해야 했기에,
일본 유학시절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번역을 선택했다.
번역도 바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기에 번역 공부를 해야 했다.
번역 공부를 하면서 서울로 올라갈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나는 옹달샘에서의 생활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인연은 모르는것이라고 했던가?
2012년 2원 10일, 옹달샘에서 다시 한번 연락이왔다.
이번에 아침편지 여행을 아오모리로 가는데, 아침편지 여행의 통역으로 일해볼 생각이 없으냐고 말이다. 약 5초 정도 생각해보고 하겠다고 했다. 이런 경험을 쌓을 기회는 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통역의 경험도 없고 아오모리 지역에 가 본 적도 없는 나에게 이런 기회가주어진 것은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
제의를 받고 다음날 옹달샘으로 올라가면서 나는 떨렸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경험이없는데 잘 해낼 수 있을까? 겉으로는 아무일 없는 척 했지만, 속은 아니었다. 자원봉사를 겸해 출발 전에 미리 올라와 있었지만, 일이 잘 잡히지 않았다.
어느덧 여행 날짜는 다가와있었고, 나는 비행기 사정으로 하루 일찍 아오모리로 향했다. 낯선 곳에서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지만, 주눅들지 않기로 했다. 역시 여행 초반에는 긴장과 당황이 겹쳐져통역이 매끄럽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모두에게 폐를 끼치는게 아닐까 하는 걱정도 했다.
하지만, 어느새 아침지기들 사이에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녹아 들어 함께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여행에 참가한 분들을위해서 동분서주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옹달샘 프로그램 중에서 엑기스만 뽑아 놓은듯한 프로그램들과 일본 최고의 온천들은 나 스스로의 내면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여행 참가자 분들과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정말 수고했다는 말을 들으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함과 감사함을 느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나에게 부족한 점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 앞으로 통역을 한다면 어떤 식으로 해야 하겠다는 생각도하게 되었다.
처음 옹달샘에 도착했던 그 어색하던 시기로부터 2012년 2월 28일 옹달샘을 떠날 때까지 별의 별 일이 있었다.
처음 자원봉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분명히 힘든 일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이 옹달샘의 청년 자원봉사시스템을 통해 긍정적인 변화를경험했다. 처음 겪어보는 일들도많았고, 좋았던 일, 싫었던일, 황당했던 일, 즐거웠던 일, 내면의 성장을 이끌어 내는 일 등등 수많은 경험을 했다. 이 경험들이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데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을 믿고 고마움을 알게 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일깨워 준 곳이기에 나에게 매우 특별한 곳임에는 틀림없다. 약 3개월 반 동안 인연을 맺은 깊은산속 옹달샘은 내 마음속에 ‘사랑과 감사’라는 DNA를 심어준 고마운 곳이다. 그리고, 옹달샘을 지키고 있는 아침지기 분들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앞으로도 많은 청년들이 깊은산속 옹달샘에서 소중한 경험을 쌓아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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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전북 남원에서 온 25살 이창섭입니다.
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 꿈만 있고 방황하는 청년 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즐겨 보시던 고도원의 아침편지의 하루 명상이라는 프로그램을 함께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루만 대충 때우자 하는 심정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고 나서 저의 마음은 풍선이 바늘에 터지듯 “뻥”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기계신 분들은 항상 웃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루 명상을 마치고 우연히 청년 자원봉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아버지께 이런 것들이 있다 말씀드렸더니 직접 신청해 주셔서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와 상의도 없이 신청하신 아버지가 미웠지만 오래전부터 “남을 돕는 삶”을 한번쯤은 해보고 싶었고 봉사다운 봉사, 스스로 자원해서 “봉사”라는 것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2012년 1월 11일 이곳에 오기까지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버스를 환승해야 했고 또 버스를 타고 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아는 분이 없어서 정류장에서 옹달샘까지 걸어 올라오는 불상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힘든 것도 잠시 여기 있는 분들은 역시나 웃고 계셨습니다.
‘웃는 사람에게 침 못 뱉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주위 분들이 처음 오는 저를 적응하도록 옆에서 도와주고 관심도 많이 주었습니다. 그리고 통나무 명상, 춤 명상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참여해서 명상을 통한 마음의 치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사람들이 항상 웃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오기 전에 저의 별명은 미소천사였습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항상 잘 웃고 화가 나도 미소를 띤 얼굴이었기에 붙여진 별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비슷한 말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나 이외의 주위 분들이 항상 웃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프로그램 참여하시는 분들, 스테이 하시는 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웃는 얼굴이 된다는 점도 놀라운 일입니다.
가끔 친구들과 술자리를 같이 할 때면 이곳 옹달샘에서의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그러면 친구들의 대답은 시간낭비이다, 돈도 안되는 짓 뭐하러 하느냐 식의 말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옹달샘에서 사람 대하는 방법, 명상 등을 배웠고
특히 웃음에 대해 다시 한 번 배웠습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이웃들에게 이곳을 알려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소중한 것이 있으면 주머니 속에 넣고 저만 간직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만큼 저에게는 소중한 추억이었고 간직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뜻이 있다면 자원봉사에 도전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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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깊은산속 옹달샘의 물을 듬뿍 마신 김은희입니다.
옹달샘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려니 옹달샘에 처음 갔을 때가 떠오릅니다.
휴학을 한 저에게 어머니께서 자원봉사를 권유하셨습니다. 흥미로운 제안이었지만 다달이 참석해야 할 행사와 결혼식이 있어 자원봉사를 미뤘습니다. 옹달샘에 간 11월에도 결혼식이 두 번이나 있어 어떻게 할지 고민했고 이런 식으로 미적거리다가는 끝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 인생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옹달샘에 왔습니다.
처음 며칠은 힘들고 피곤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저는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청년자원봉사 12기로 만난 두 명의 자원봉사자들과 호흡이 잘 맞았고
아침지기들께서 유쾌한 주파수를 많이 보내주셨습니다.
일상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저는 쪽지 쓰는 것을 좋아해 이삼일 간격으로 옹달샘에 있는 분들께 쪽지를 썼습니다. 쪽지를 쓰면서 상대방이 나에게 고마움을 주었는지 되돌아보았습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아침에 쓴 쪽지를 상대방에게 전해주었고 상대방은 쪽지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나중에는 쪽지를 기다린다고 하는 분도 나왔습니다. 작은 일 하나로 행복을 주고받을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매일 읽는 아침편지도 저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신기하게도 행복한 하루를 보내면 그 하루에 감사하도록 하는 편지가 다음날에 왔고, 힘든 하루를 보내면 그 힘듦을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을 제시해주는 편지가 왔습니다. 느낌 한마디를 쓰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알 수 있었고 제 생각도 더 탄탄하게 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옹달샘에 머무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저에게 옹달샘은 최고의 장소였습니다. 기대감에 하루하루가 들떴고 호기심이 가득했습니다. 활기가 가득 차고 열정적이고 행복한 매일을 보냈습니다.
옹달샘에서 제 인생 최고의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옹달샘에 가기 전의 저는 감정조절에 서툴렀습니다.
호불호가 얼굴에 선명하게 드러났고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제 감정에 휘둘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옹달샘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하며
좋은 답을 얻었습니다.
특히, 자원봉사를 끝낼 무렵 잠깐멈춤에 보조스텝으로 참여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향지샘께서 세상의 모든 영혼은 소명을 지니고 왔다고,
악하게 행동한다고 싫어하지 말라고, 그 영혼은 악인 역할을 맡은 천사일 거라고, 악인이라는 자기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고 해주신 말씀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침지기께서 상대의 나쁜 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뒤에 상대의 좋은 점을 떠올려보라고, 그게 진짜 긍정이라고, 절대긍정이라고 일러주신 것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고도원님의 꿈너머꿈 특강을 들으며 저는 제 꿈너머꿈을 세웠습니다.
제 꿈은 여행을 다니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온전히 저만을 위한 꿈이었고 이타성을 생각하지 않은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꿈을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바꾸고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꿈너머꿈을 세웠습니다. 옹달샘에서 생활하면서 제가 행복하면 그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쉽게 나눠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제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도 알았습니다. 일이나 여행은 행복의 요소이지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는 생각도 이 꿈과 꿈너머꿈을 가지게 했습니다.
옹달샘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은 아쉽습니다.
어떤 것을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해 미련이 남는 것이 아닙니다. 옹달샘에서 있으면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에 아쉬운 것입니다. 좋은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도 이유입니다. 하지만 옹달샘에서의 생활을 통해 행복을 찾는 법도 익혔고 옹달샘의 사람들과 영영 인연을 끊을 것이 아니기에 그리 슬프지 않습니다. 이십대를 시작하는 중요한 시점에 옹달샘을 만나 기쁩니다. 옹달샘에 찾아올 많은 이들이 저처럼 만족감을 느끼고 돌아가기를, 옹달샘에 머무르는 이들이 저처럼 행복하기를, 옹달샘이 더 좋은 곳으로 성장해가기를 애정을 듬뿍 담아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