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든 마음 치유법' 멍청해 보일 정도로 멍때려 보십시오
생각의 흐름이 멈추는 순간, 뇌가 초기화로 리셋
우리 머릿속도 '쉼표'가 필요합니다…
잠시 나를 내려놓으면 여유가 생겨요
여백 없는 수묵화를 본 적이 있는가? 쉼표나 마침표가 없는 글을 본 적은? 그림에만 여백의 미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글에서만 쉼표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치열한 삶에다 컴퓨터, 각종 스마트기기에까지 노출돼 있는 현대인들의 뇌는 지나친 자극에 비명을 지르고 있다. 컴퓨터에서는 수많은 정보들과 반짝이는 배너, 하이퍼링크들이 끊임없이 뇌를 움직이게 만든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스마트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뇌는 거의 탈진 상태다. 길을 걸을 때도,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도, 심지어는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도 끊임없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TV를 보면서도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하고,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SNS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단다. 휴식을 취한다는 미명 아래 게임에 몰두하는 사람도 많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정보를 받아들여 분류`저장 처리하느라 뇌는 1분 1초도 쉴 여유가 없다. 우리의 뇌도 '쉼표'가 필요하다. 컴퓨터에 여유 메모리가 충분해야 원활하게 작동하듯 우리의 머릿속에도 여유 공간이 남아 있어야 새로운 생각을 채우고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 가끔 '멍 때리기'가 필요한 이유다.
◆자연 속에서 생각을 내려놓다, 멍 스테이
뿌옇게 안개 가득했던 머릿속이 간만에 말끔해졌다. 고장 난 카메라 렌즈처럼 포커스가 맞지 않던 머릿속이 마침내 또렷한 상을 맺은 느낌이랄까.
'멍때리기'를 위해 충청북도 충주 노은면에 자리 잡은 '아침편지 명상치유센터-깊은산속 옹달샘'(이하 옹달샘)을 찾았다. '고도원의 아침편지'로 온 국민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주인공이자, 아침편지문화재단의 이사장인 고도원 작가가 2010년 시작한 '옹달샘'은 지친 일상 속 휴식이 필요한 현대인들에게 다양한 힐링과 명상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곳이다. 최근 '슈퍼맨이 돌아왔다' 고지용`승재 부자가 이곳에서 '멍 스테이'를 체험하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옹달샘은 멍 스테이 외에도 자연명상 스테이를 비롯해 음식`스파단식`요가`산삼`북 스테이 등 다양한 테마별 스테이 프로그램과 힐링명상, 건강`예술 치유 프로그램 등을 진행 중이다.
이름만큼이나 깊은 산속 아늑한 곳에 자리 잡은 '옹달샘'은 작은 하나의 마을처럼 꾸며져 있었다. 도서관과 명상센터, 아기자기한 숙소와 잘 가꿔진 정원, 식당과 카페, 그리고 '옹달샘'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작은 토끼장까지 세심한 부분까지 정성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머무는 이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어주는 공간이었다.
방을 배정받고, 명상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뒤 본격 '멍' 타임에 돌입했다. 멍 때리기는 아무런 생각 없이 넋을 놓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작 멍 때리는 건데 그게 별거야?" 만만하게 생각했지만 정작 '멍' 때리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잠시 멍 하나 싶더니 자꾸만 상념이 중간중간 끼어들며 마음을 어지럽혔다. "커피나 한잔 할까? 덥네. SNS에는 어떤 댓글이 달렸을까. 일할 게 많은데…" 등등 갖가지 생각들이 두서없이 불쑥불쑥 튀어 올랐다.
다행인 것은 내가 푸르른 숲속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잠시 표류했던 나의 마음은 이내 자연을 똑바로 응시했다. 풀 내음, 바람 소리, 물소리, 다양한 꽃들의 색감 등 오감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좋았다.
졸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듣고 물의 파동을 보며 한참을 멍하니 쪼그리고 앉았다. 녹음이 정점을 찍은 짙푸른 나뭇가지로 옮겨가니 또다시 '멍~' 생각의 흐름이 멈추는 순간이 찾아왔다. 예쁜 꽃들도, 잡초도, 심지어 바위에 낀 여러 모양의 이끼들까지 하나하나 한참을 바라보며 자꾸만 뻗쳐나오는 생각의 갈래를 끊어냈다. 마음에 '멈춤' 스위치를 켰다 끄기를 반복했다. 그러기를 한참을 반복하자 마침내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던 짙은 스모그가 걷히면서 생각이 또렷해짐을 느낄 수 었었다.
사실 '멍 스테이'는 여느 힐링`명상 프로그램과 별 다를 바 없다. 다만 '멍 스테이' 참가자에게는 '멍'이라고 쓰인 배지를 준다. 배지를 달고 있으면 '옹달샘'에 함께하는 참가자들은 물론 직원 누구도 말을 걸지 않는다.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장함이 멍 스테이 최고의 특권이다.
이 때문에 멍 스테이는 2인 이상의 참가신청이 불가능하다. 옹달샘 윤나라 실장은 "멍 때리기는 혼자서 하는 활동이다 보니 누군가 동행하면 본래의 취지를 살리기가 힘들다"며 "당초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는 1인만 신청 가능하도록 했지만, 아직 혼자 무언가를 하는 데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보니 최대 2명까지 함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낭비가 아닌 '창조'를 위한 비움의 시간
'멍 때리기'가 인기를 끈 것은 2014년 서울 광장에서 멍 때리기 대회가 열리면서부터다. 현대인의 뇌를 쉬게 하자는 의도로 시작된 이 행사는 이색 대회로 큰 화제를 모았고, 이후 전국적으로는 물론이고 중국까지 건너갔다.
멍 때리기 대회의 규칙은 까다롭다. 3시간 동안 휴대전화나 시간을 확인해서는 안 되고, 잠이 들어서도 안 되며, 잡담이나 노래 부르기, 책읽기, 웃기 등이 금지된다. 철저히 '묵음'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15분마다 심박수를 체크하기 때문에 최대한 안정적인 심리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경기를 관전하는 시민들의 투표도 수상자를 뽑는 데 중요한 요소다. 2014년 제1회 대회에서는 당시 9세 김지영 양이 우승을 차지했고, 2016년 2회 대회에서는 가수 크러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올해 대회에서는 파자마 차림으로 나타나 눈길을 끈 직장인 2명과 취업준비생 1명으로 이뤄진 일반인 팀이 우승을 거머쥐었다.
최근 각종 예능 방송에서도 '멍 때리기' 예찬론이 펼쳐지고 있다. 뇌과학자인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는 강연 및 예능 프로그램에서 "창의성은 몰입 아닌 '멍 때리기'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효리네 민박에 출연 중인 싱어송라이터 아이유는 '멍 때리기 장인'으로 등극했다. 수시로 멍 때리는 아이유의 모습이 매회 빠지지 않고 전파를 탔기 때문이다. 그동안 인간은 '몰입'을 통해 창의성을 추구했다. 하지만 오히려 뇌는 완전히 비목적적인 사고, 즉 '멍 때리는' 상황에서 창의적인 활동을 하는 뇌의 부분이 활성화되는 유레카 모먼트를 드러낸다는 것이 뇌과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것이다. 멍 때리기는 의학용어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고 불린다. 2001년 미국 워싱턴대학 의대 마커스 레이클 교수가 뇌는 '사용할수록 활성화된다'는 기존 연구이론을 뒤집고 '인간의 뇌에는 생각에 몰두할 때 활동이 줄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일 때 오히려 활성화되는 영역이 있다'고 발표했다. 컴퓨터를 리셋하면 초기 설정 상태(default)로 돌아가는 것처럼 사람의 뇌도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할 때 피로가 쌓이기 전의 초기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 아르키메데스가 머리를 식히기 위해 들어간 목욕탕에서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유레카'를 외친 상황이 좋은 사례다.
'멍' 애찬론이 커지면서 전남 완도군 생일도는 '멍 때리기 좋은 섬'을 테마로 홍보하고 있다. 하늘나라 궁궐을 지으려고 가져가던 바위가 떨어졌다는 자연돌숲(너덜겅)과, 출렁이는 파도와 몽돌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용출갯돌밭,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구실잣밤나무숲 등 3곳이 멍 때리는 장소로 제격이다.
'멍 때리기'를 습관적으로 자주 한다고 해서 뇌의 활동성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습관적으로 멍 때리다 보면 뇌세포의 노화가 빨리 진행돼 치매 가능성이 높아지는 경우도 있고, 나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우울증이 생기기도 하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낳기도 한다. 멍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 생각이 복잡한 날 가끔 때리는 것이 좋다.
[흥] 고도원 아침편지문화재단 이사장
"자신의 몸에서 신호가 오기 전에 잠시 멈추는 습관 키워라"
긍적적인 마인드로 세상 보게 돼
자연 느낄 수 있는 곳이 좋은 장소
휴식이 중요…경쟁 대회는 말길
"뜨거운 사막에만 오아시스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인생의 길에도 잠시 쉬어갈 오아시스는 반드시 필요하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고, 사막은 뜨겁다. 저 뜨거운 사막을 무사히 건너기 위해 폭염에 지친 몸을 씻고 희망의 구릉을 다시 오르기 위해서 우리는 잠시 멈춰서야 한다."
<고도원 '잠깐멈춤' 中>
17년간 '아침편지'를 통해 365만 독자와 희망의 메시지를 나누고 있는 아침편지문화재단 고도원(65`사진) 이사장. 그는 '멍 때리기'를 '잠깐멈춤'이라고 표현했다. 무념무상의 상태로 잠시 '멍~' 하다 보면 뇌를 초기 상태로 리셋해 편견과 부정적인 생각, 패턴을 걷어내고 긍정의 마인드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긍정의 기운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멍 때리는 장소 선택이 중요하다. 고 이사장은 "가장 좋은 멍 때리기 장소는 자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며 "가스실이나 터널에 앉아 멍 때린다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해보라. 그래서 우리에겐 비 오는 창가가 필요하고, 꽃밭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고 이사장은 최근 인기리에 진행되고 있는 '멍 때리기 대회'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그는 "멍 때리기 대회가 뇌 휴식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는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승부로 하면 고역이 될 수 있다"며 "멍 때리기는 경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생각을 내려놓고 흘려보내는 것"이라고 밝혔다. 단순히 무념무상의 멍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상태가 아니라 결국 멍 때리기는 한발 떨어져 자신을 바라볼 여유를 갖고 성찰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고 이사장의 '멍 때리기' '잠깐멈춤'은 그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30년 기자생활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 대통령 연설담당 비서관을 지냈던 그는 2001년 전력 질주하던 그의 삶에서 '강제 멈춤'을 당했다. 온몸이 굳어 쓰러지게 되었다.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시작한 활동이 '아침편지'다. 좋은 글을 통해 좋은 기운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는 사람들에게 '잠시 멈춰 서는 방법'을 전파한다. 자신의 몸에 신호가 왔을 때 멈춰서야 하고,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신호가 들어오기 전에 잠시 멈추는 습관을 통해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고 이사장은 "잠시 뇌를 쉬게 하고 몸을 쉬게 하는 '멈춤'이 바로 명상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한윤조 기자 cgdream@ms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