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희 서울 서초구청장] 저녁은 이 땅의 남자들이 아버지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저녁이면 바쁜 사람도, 굳센 사람도, 바람 같던 사람도 일제히 집에 돌아가 아버지가 된다. 넥타이를 풀고 양복도 제복도 벗어버린 사내들은 아버지로 돌아가 어린 것들을 위해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다. 시인 김현승의 '아버지의 마음'이 그리고 있는 정경이다.
어릴 적 나의 추억에서도 아버지는 저녁과 함께 돌아오셨다. 나의 아버지는 가부장적 유교문화가 익숙한 경상도 분이시다. 한때 교편을 잡으셨는데 술을 잘 즐기시지 않아 퇴근하면 곧장 집에 돌아오시곤 하셨다. 저녁 무렵 아버지 인기척이 들리면 오빠와 나, 내 동생은 조르르 현관문으로 달려가 마중했다.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하고 절하면 아버지는 삼남매 머리를 하나하나 쓰다듬으시며 흐뭇해 하셨다. 교육자이신 아버지는 예절을 가르칠 때는 엄했지만 우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따뜻했다.
예전 아버지들은 비슷한 습관을 갖고 있었나 보다. 시인 박목월의 아들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의 글을 읽다가 반가운 미소를 지은 적이 있다. '아버지 박목월'도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좋아했다. 식사자리에 가족이 둘러앉으면 언제나 “다 왔니” 하며 다섯 아이 머리를 일일이 쓰다듬은 뒤에야 수저를 들었다고 한다. 박동규 교수의 추억 속에서도 아버지의 손은 엄하면서도 따뜻했을 것이다.
어렵던 시절의 아버지들은 어린 것들을 쓰다듬으며 가장으로서의 마음 자세를 다잡았다. 아이들도 또한 엄하고도 따뜻한 그 손길에서 '아버지 마음'을 느끼며 올곧게 자라났다. 저녁 시간 아이와 체온을 나누는 아버지 손길 아래서 가정의 행복은 빚어진다.
그런데 이 소박한 저녁 풍경이 이제는 점점 기대하기 힘든 세상이 돼 가고 있다. 요즘 직장인들의 최대 소망이 '저녁이 있는 삶'이라고 한다. 저녁이 돼도 이 땅의 많은 아버지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현대사회는 '아버지 없는 사회'(Fatherless Society)라고 한다. 독일 심리학자 알렉산더 미체를리히의 말대로 아버지들의 권위와 지위는 예전 같지 않다. '아버지의 부재'는 아이들에게도 익숙한 풍경이 돼 버렸다. 문제가 생기면 아빠와 의논하겠다는 청소년이 고작 4%에 불과하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 고교생의 22%는 아빠와 하루 1분도 대화하지 않는다는 통계도 있었다.
문제는 아버지의 위기는 아버지만의 위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위기는 곧 사회 위기로 이어진다. 현대사회 문제들은 대부분 가정에서 비롯되며 가정 문제의 상당 부분은 아버지에게서 출발한다. 현대인들이 앓는 심각한 질병 중 하나는 '아버지 결핍증'이라는 말도 있다. 비행 청소년들은 대개 '아버지 부재'라는 공통의 질병을 앓고 있기도 하다.
아버지들이 제자리를 찾아야 가정이 평안해지고 사회가 건강해진다. 서초구에서 전국 자치단체 최초로 '아버지센터'를 만든 이유다. 지난 9월 1일 문을 연 아버지센터는 지친 이 시대 아버지들이 열정과 자긍심을 되찾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한마디로 아버지들의 '행복에너지 충전소'라고 할 수 있다. '아침편지'로 잘 알려져 있는 고도원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아침편지문화재단에서 운영을 맡았는데 신청자가 몰려 조기 마감할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아버지 부재' 시대에 제 위치를 찾으려 노력하는 아버지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다.
서초구에서는 최근 '어진 할아버지학교'도 열었는데 영유아 손자손녀를 돌보는 할아버지들에게 최신 육아법을 가르쳐준다. '할빠(할아버지와 아빠의 합침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버지 결핍증'이 심각한 이 시대는 새로운 대응법을 요구한다. '어진 할아버지학교'는 그 중 하나라고 하겠다.
해는 짧아지고 그림자는 길어진 겨울 초입이다. 하루로 치면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 무렵인 셈이다. 지친 걸음으로 긴 그림자 끌고 가는 이 시대 아버지들에게 '아버지센터'가 행복으로 향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행복은 아이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의 손끝에서 빚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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