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가 만난 사람(3) 고도원 아침편지문화재단 이사장
[중앙일보] 입력 2017.03.05 00:02
나권일 기자리더는 사람 앞에 서는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다. 사람 앞에 서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절대고독의 강을 건너게 돼있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절벽과도 같은, 적막강산과도 같은 불면의 밤이 찾아온다. 칼날 위에 서있는 것 같은 그때, 리더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발걸음을 내딛느냐에 따라 리더 자신은 물론 자기가 속해 있는 조직과 공동체의 운명이 결정된다. 평소 훈련을 통해 내성을 가진 사람은 이겨낼 수 있지만 절대고독의 시련과 고통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은, 쉽게 무너진다.
절대고독을 경험해보지 않은 리더는 위기가 닥치면 당장 얼굴색부터 달라지고 기운이 떨어지고, 끝내는 다음 행보를 잇지 못한다. 가까운 예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그렇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리더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과 역경을 선물로 생각하는 사람, 과거의 역경이나 고난의 열배, 백배가 와도 견뎌낼 내공과 자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찌 정치리더 뿐이겠는가. 기업의 리더도 마찬가지다. 울산의 허허벌판에 외국 차관으로 조선소를 지어야 했던 아산 정주영에게도 절대고독의 순간이 있었다. 영국에 가서 어찌어찌 금융권에 발이 넓은 롱바톰 회장을 만나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 짜리 지폐까지 보여줘가며 금융계 인사를 소개받은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배를 사겠다는 선주(船主)를 구해오면 차관 도입에 보증을 서겠노라는 영국수출신용보증국의 엄정한 통보 앞에 아산은 절대고독 속에 불면의 밤을 겪어야 했다. 한 고비 넘으면 또 한 고비.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자신만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배를 만들어내겠으니 선주를 찾아달라는 아산의 열정을 보고 롱바톰 회장이 말한다. "내가 아는 사람을 총동원해서라도 그리스 선주를 잡아봅시다." 아산은 결국 롱바톰 회장 처가의 네트워크까지 끌어들여 유조선 2척을 수주하는 데 성공한다. 절대고독을 겪어낸 아산에겐 불가능은 없었다.
'악법도 법이다.' 독배를 마시기 전날 밤, 소크라테스의 고뇌에 찬 결정도 아마도 절대고독 속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그 아이를 반으로 갈라 공평하게 나누어 주어라'. 아이를 살리고 거짓 어미를 회개시킨 솔로몬의 명판결 역시 절대고독의 강에서 길어낸 지혜일 수 있다. 사례는 차고 넘친다. 고도원은 참 좋은 테마를 택했다. 절대고독이라니. 고.도.원, 그의 이름과도 절묘하게 어울리지 않은가!
짤막한 글 한 톨에도 자기의 혼이 들어가야 하는 게 글쟁이의 삶이다. 대통령 연설문 쓰던 5년이 제게는 절대고독의 시간이었다. 인생 최고의 고난의 시기였다. 철두철미한 노교수 밑에서 조교생활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분의 언어의 저장고는 어마어마했다. 사고의 구조가 논리적이고, 기억력도 좋은 분이다. 게다가 다독가이고 문필가이고 연설가다. 그런 대통령의 연설문을 쓰려면 철저히 나를 비우고 그분의 뱃속(胸中)에 들어가서 대통령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봐야 했다. 엄청난 세상 공부였다. 국가 최고 지도자가 혼자 겪어야 하는 절대고독의 순간을 내가 용케도 곁눈질 한 것이다. 그렇게 5년 동안 천금같은 무게에 눌려 살다가 터질 것 같은 가슴속 이야기를 날마다 바늘구멍 같은 숨구멍 하나 내서 토해냈던 게 '고도원의 아침편지'다. 그때의 경험 속에서 얻은 것들을 묶어 펴낸 책이 『절대고독』이다.
리더는 꿈을 꾸는 사람, 첫길을 내는 사람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기에 막막하고 두려움이 있다. 고난은 다반사다. 천신만고 끝에 수풀을 헤치고 개활지에 나왔는데, 적군 수십만이 기다리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내가 괜한 일을 하나 싶기도 하고, 비난과 곡해와 편견에 시달린다. 도와주는 이만 있는 게 아니라 발목 걸고 짓밟는 사람이 더 많다. 제가 청와대에서 일하던 5년 동안 가장 많이 본 것이 사람들의 변심(變心)이었다. 99가지 은혜를 입었던 사람이 단 한 가지 불만 때문에 비수를 꽂는다. 리더들은 고독과 벗하면서 사람들의 변심에 견뎌내는 내공이 반드시 필요하다.
경영 구루인 피터 드러커가 '대통령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원칙 6가지'를 말한 게 있다. 그 중 하나가 "대통령은 정부 안에 친구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부 안에 있는 친구들은 대통령의 신임을 빙자해서 권력을 남용하기 쉽다. 대통령은 외로운 자리라서 자기가 믿는 친구나 부하들을 곁에 두고 싶기 마련이지만 그럴수록 그런 유혹에 빠지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 임기 말에 국민적 비난을 받았던 한국의 몇몇 대통령들 곁에는 친구를 곁에 둔 이들이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은 시대 정신의 표상이자 영혼을 담은 목소리여야 한다. 제가 운영하는 '깊은산속 옹달샘'의 중요한 프로그램 중 하나가 '링컨학교'다. 5년 사이에 8700명이 거쳐 갔다. 왜 링컨이냐고?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Gettysburg Address)은 지금 읽어봐도 불멸의 서사시다.
"87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 신념으로 세운 나라가 이 지구상에 존속할지 말지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에게 남은 일은 명예로이 죽은 이들의 뜻을 받들어, 그분들이 마지막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한 그 대의에 더욱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고, 신의 가호 아래 이 땅에 새로운 자유를 탄생하게 하는 것이며,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가 이 지구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연설은 한편의 서사시다. 유명한 마지막 구절은 신을 위해 봉헌된 정부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멸의 다짐이다. 링컨은 이 짧은 연설 안에 한 편의 시처럼 탄생, 죽음, 재생이라는 상징적 은유 구조를 집어넣었다. 정치 지도자의 연설치고 이처럼 간결하면서도 강력하고, 쉬운 말을 쓰면서도 감동적일 수 있었던 예는 없었다. 링컨의 평소 언어의 저장고가 말라 있었다면 이런 고매한 언어가 나오지 않는다. 알다시피 링컨은 어마어마한 독서광이었다. 고난 속에 있을 때마다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왜 이 세상에는 비극이 반복되는가?" 평생을 묻고 물으며 영혼의 깊은 호흡으로 읽었다. 그래서 즉흥연설인데도 이 같은 영혼의 서사시가 터져 나온 것이다. 무릇 지도자의 언어는 링컨의 언어가 돼야 한다. 그런데 이게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훈련돼야 한다. 제가 링컨학교를 운영하는 이유다.
효율적인 쉼이 필요하다. 일부러라도 절대고독의 시간을 가지라고 권하고 싶다. 그게 명상이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깊은 호흡을 하고, 멍하니 앉아 있어 보라. 비가 오면 한 자리에서 두세 시간 그냥 비 떨어지는 것만 바라보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 내 안의 내가 정화되기 시작한다. 나의 내면에서 에너지를 끌어올린다. 저는 10년째 그렇게 명상을 하고 있다. 지금처럼 그냥 질주만 하면 강제적인 멈춤이 온다. 엔진이 다 연소해버린다. 그렇게 되기 전에 의지를 갖고 고요한 성찰의 시간을 가져볼 것을 권유한다. 절대고독의 시간을 스스로 만들고 겪어본 사람이라야 진짜 리더다.
부와 성공도 추구할 만한 가치다. 하지만 부와 성공을 이루고 난 뒤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봐야 한다. 끝내 자기중심적이고 사적 이익에 멈춰 있다면 진짜 성공이 아니다.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미란 말인가? 리더는 이타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늘 공동체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가진자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자꾸 생겨나야 한다. 그것이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될 때 우리 사회도 성숙해질 것이다.
『 절대고독』에서 음미할 만한 몇 가지
혼자 있는 법을 배워라 외로운 시간. 홀로 있는 시간. 피할 수 없는 힘든 시간입니다. 그러나 '좋은 선물'을 받는 값진 시간이기도 합니다. 고요, 평화, 침묵, 성찰, 자신감, 창조적 영감은 혼자 있는 시간에만 찾아오는 귀빈들입니다. 혼자 있는 시간, 외로운 시간을 만들어 즐기십시오. 내면 깊숙이 잠들어 있던 자신감이 눈을 뜰 것입니다. 고갈된 마음의 우물을 채우고 하마터면 놓칠 뻔했던 창조의 샘물을 퍼 올릴 수 있는 값진 시간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따금 직면하는 자기 점검의 물음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어떻게 달라져 있는가. 어제와 오늘의 나를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느냐가 내일의 나를 결정하고 미래를 지배합니다. 가치 있는 인생은 오늘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오늘 내가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왜 물을 엎질렀나 일을 하다 보면 이따금 물을 엎지를 수 있습니다. 일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일하지 않으면 엎지를 물도 없을 테니까요. 엎지른 것은 엎지른 것입니다. 다시 쓸어 담을 수 없습니다. '비싼 수업료 냈다' 생각하고 깨끗이 잊어버리십시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 세상 풍랑을 다스리기 전에 내 마음의 풍랑을 먼저 다스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악한 마음을 탓하기 전에 내 안의 늑대부터 몰아내야 합니다. 칭기즈칸의 말입니다. "내가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니 칭기즈칸이 되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