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비상식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첫 말문 연 DJ 연설비서관 고도원
승인 2016년 11월 06일 00:09
김지성 기자, 이청파 기자
「연세춘추」 기자로 썼던 글들,
문제가 돼 제적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내면과 연설에 대해 처음으로
언론에 입 열어 "대통령의 연설문은 시대의 정신...
이 의미를 놓치면 국가의 비전을 잃는 것"
"朴 대통령 연설문 유출은 국가적 시스템의 붕괴"
"이런 비상식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지난 10월 30일 일요일, 고도원 작가를 만났다. 고도원 작가는 「뿌리깊은나무」와 「중앙일보」의 기자를 거쳐 김대중 정부 당시,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지냈다. 현재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날 고도원 작가는 박근혜 대통령 연설문 유출 사태에 대한 입장을 언론에 처음으로 밝히기도 했다. 인터뷰는 충북 노은면에 있는 그의 집필실에서 이뤄졌다. 다음은 우리신문과 고도원 작가의 일문일답이다.
어둠의 시대를
펜으로 써내려갔던 대학생
Q. 대학생 시절 「연세춘추」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의 이야기들을 듣고 싶다. ‘인성’도 실력인 시대, '창의력'은 더 큰 실력인 시대이다.
A. 내가 1971년에 신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2학년이었던 1972년부터 「연세춘추」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73년 2학기부터 1974년 1학기까지는 연세춘추에서 편집국장을 맡았었다. 당시는 유신시대로서 굉장히 옥죄던 시절이었고 토씨 하나에도 사람의 운명이 갈리던 때였다.
Q. 「연세춘추」에는 십계명이라는 칼럼 꼭지가 있다. 이 칼럼 꼭지를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들었다. 십계명이라는 칼럼 꼭지를 만든 계기가 무엇인가?
A. 1972년 10월에 유신헌법이 발표됐다. '세상이 거꾸로 가고 있고, 정상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현재의 세상을 글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편집국장이 된 후 십계명이라는 기명 칼럼을 만들었다. 십계명은 '이 시대에 꼭 지켜야 할 것, 그 최소한은 무엇인가' 등을 묻고 싶은 마음으로 지은 이름이다.
Q. 서슬 퍼런 시대에 글들을 썼다. 대학생활이 순탄치 않았을 것 같다.
A. 기사나 칼럼 때문에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중앙정보부가 있던 남산도 가고 서대문 경찰서도 가고. 그리고 1975년 5월,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됐다. 당시 전국적으로 786명의 대학생이 제적됐는데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제적 이후 군 입대했다.
낙인 찍힌 청년,
어렵게 시작한 기자 생활
Q. 당시에 대학졸업장도 없는 청년이 기자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을 텐데.
A. 그렇다. 그래도 일단은 「뿌리깊은나무」라는 잡지사에 지원을 했다. 당시 편집장은 내가 대학졸업장이 없는 것을 알았지만 글솜씨를 인정하며 나한테 ‘사장과 면접을 할 때, 그냥 대학을 나왔다고 답해라’라고 말했다. 렇게 우여곡절 끝에 1979년 「뿌리깊은나무」에 입사했다. 런데 입사 6개월 후, 내가 대학졸업장이 없다는 사실이 사장에게 보고됐다. 하지만 사장은 오히려 격려해줬다. 덕분에 기자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Q. 「뿌리깊은나무」에서 썼던 기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는 무엇인가?
A. 앞서 언급했듯이, 1975년 긴급조치 9호로 786명의 대학생이 제적됐다. 나도 그 중 하나였고. 이들의 그 이후 여섯해를 추적한 기사를 썼었다. 정말 발로 뛰어다니며 쓴 기사였다. 전수조사에 가깝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분류하고, 그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기사에 담았다.
Q. 「중앙일보」에서 다시 기자 생활을 이어나간 것으로 안다. 어떻게 「중앙일보」에 들어가게 됐나
A. 1983년에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당시 「중앙일보」 최우석 경제부장이 「뿌리깊은나무」를 꾸준히 읽다가 나를 알게 됐다. 그리고 그 분이 '이 친구를 신문기자 한 번 시켜보자'라고 제안해서 「중앙일보」에 들어가게 됐다.
Q. 「중앙일보」에서 썼던 글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A. 전두환 정권 하에서 경찰들이 기자를 폭행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경찰은 이를 부인하곤 했다. 그러던 중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경찰이 기자를 폭행하는 모습이 찍혔다. 이 사진을 바탕으로 '사진은 말한다'라는 칼럼을 썼었다. 이것이 여론의 반향을 이끌어냈다.
대통령의 필사(筆士),
그가 말하는 대통령의 연설문
고도원 작가의 생의 궤도를 따라 진행된 인터뷰는 어느덧 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을 지냈던 시절로 넘어왔다. 고도원 작가는 김대중 정부가 시작할 때부터 끝까지 대통령의 연설문을 책임졌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내면이나 연설과 관련해 언론에 언급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고도원 작가는 "연설비서관으로서 자신의 경험들을 의미 있게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Q. 어떻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 됐는가?
A. 「중앙일보」에서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평화민주당(아래 평민당)을 출입했었다. 당시 평민당의 총재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젊은 기자들과 차를 마시며 대담하는 걸 좋아했다. 어느 날은 김 전 대통령이
아널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책은 나 또한 15번 가까이 읽은 책이었다. 그 책에 대해서 김 전 대통령과 2,3시간 넘게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일이 나중에 연설비서관을 맡는 계기가 됐다.
Q. 연설비서관의 구체적인 업무를 알고 싶다.
A. 대통령의 모든 연설, 모든 기고문, 그리고 때때로 국민 앞에서 하는 기자회견문을 쓰는 초안책임자다. 여기에 추가로 말씀자료라는 것 또한 담당한다.
Q. 말씀자료라는 것은 무엇인가?
A. 그 날 대통령의 동선에서 어떤 톤과 어떤 매너로 말을 할지를 A4용지 1장에서 3장 정도로 요약해서 매일 아침마다 보고를 드린다. 그 날 대통령의 걸음걸이에 대해서도 말씀자료를 통해 조언을 드린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민심이다. 독립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 대통령의 말, 글, 철학을 읽어내고 이것을 국민의 민심과 연결시켜 말씀자료를 만드는 것이다.
Q. 어떻게 민심을 읽으려 했나?
A. 우선 새벽마다 주요 일간지들을 모두 읽었다. 또한 김대중 정부의 경우에는 사회 각계각층의 민심을 들을 수 있는 자문위원회가 구성돼 정기적으로 다양한 목소리를 청취했다.
Q. 연설문 작성과정에 대해 듣고 싶다. 연설문의 초안은 어떻게 만드는가?
A. 우선 1차적으로는 대통령이 연설하는 행사를 맡는 각 부처에서 실무적인 내용을 올린다. 여기에는 드라이(dry)한 팩트들이 나와 있다. 이 내용을 민심을 반영해 대통령의 말로 바꿔야한다. 여러 행정관들의 도움을 받아 연설문의 초안을 만드는 책임자가 나였다.
Q. 그렇다면 초안 작성 이후에 연설문의 수정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A. 연설문의 초안을 올리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첨삭을 한다. 김 전 대통령의 첨삭은 무시무시하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어떤 날은 김 전 대통령이 팩트 한두 개 빼고는 작은 글씨로 다 고친다. 그럼 내가 그걸 받고 다시 정리해서 대통령에게 올린다. 그럼 대통령께서 다시 첨삭한다. 이러한 과정의 반복이다. 그러다가 김 전 대통령은 그것조차도 맘에 안들면 '녹음기 가져오게'라고 말한 후 구술을 시작한다. 그럼 대통령이 구술한 내용을 내가 다시 연설문에 반영한다. 이런 식으로 최종적인 연설문이 나오는 것이다.
Q. 연설문을 작성할 때, 대통령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압력을 받은 적이 있는가?
A. 대통령은 언어를 통해 정치를 한다. 그 언어의 핵심이 바로 연설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연설에 따라 정책과 예산이 달라지기 때문에 대통령의 연설 속에 자신의 뜻을 넣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연설비서관은 이런 사람들을 무시하고 초안을 만들 책임이 있다. 김 전 대통령 또한 연설비서관의 독립성을 철저히 보장해줬다. 하루는 김 전 대통령이 '고 비서관, 요즘 연설이 좋아요'라고 나에게 칭찬을 하셨다. 그리고 이후 김 전 대통령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나에 대한 칭찬을 하셨다. 그 이후로는 정말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글을 쓸 수 있었다.
Q.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을 맡으면서 작성했던 연설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A. 2000년, 5·18국립묘지에서 열린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김대중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이 연설문을 읽어 내려갔다. '저는 오늘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감회 속에 이 자리에 섰습니다. 20년 전 오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고귀한 생명을 불사른 민주영령 앞에 이제 저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서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연설문은 국민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내가 올린 초안을 대통령이 토씨 하나 안 고친 몇 안 되는 연설문 중 하나다. 그 즈음에는 대통령의 뱃속으로 들어갔던 것 같다. 이 일이라면 내가 목숨을 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Q.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을 맡았던 사람으로서, 대통령의 연설문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나?
A. 대통령의 연설은 그 시대의 정신이다. 그 시대에 국가가 나아가는 비전의 불꽃과도 같다. 대통령의 연설문에서 점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통령의 연설문은 사람을 움직이고 역사를 바꿔야 한다. 도도히 흘러가는 역사의 추진력을 높이거나 방향을 바꾸는 것에 동원되는 것이 바로 연설문이다. 지엄한 것이다. 엄청난 것이다. 이 의미를 놓치면 국가의 비전을 잃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연설문 유출,
국가적 시스템이 무너졌다
대통령 연설문에 대한 그의 열변은 자연스레 박근혜 대통령 연설문 유출이라는 작금의 사태를 떠올리게 했다. 지난 15년간 현실정치에 대한 발언을 아껴왔던 그이지만, 박근혜 대통령 연설문 유출과 관련한 기자의 질문에 침착하지만 강한 어조로 답변을 이어나갔다.
Q.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특히 최순실씨가 박 대통령의 연설문을 수시로 사전에 열람하고 수정했다는 사실은 국민적 공분을 자아냈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A. 국민적 자존감이 무너졌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의 연설문을 썼던 사람으로서 이런 비상식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Q. 김대중 정부 시절, 사인(私人)에게 대통령의 연설문이 사전에 유출된 적이 있는가.
A. 전혀 없었다. 그건 상식적인 것이다. 대통령의 연설은 국가지도자의 연설이기도 하지만 시스템의 핵심이기도 하다. 대통령 연설문의 생산, 관리, 유포는 다 시스템의 영역이다. 이러한 대통령 연설문이 사전에 유출된 것은 국가적 시스템이 무너진 것이다. 보통 일이 아니다. 현 정부에는 목숨 걸고 일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연설비서관으로 일하면서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수석비서관실 문짝을 차고 들어간 적도 있다. 그렇게 누군가가 안에서 목숨 걸고 종을 쳐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Q. 박근혜 대통령은 유독 설화(舌禍)가 많았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를 잘못 말하고, '우주의 기운', '혼이 비정상' 등 논란이 될 만한 표현들을 썼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A. 대통령의 언어는 자신이 과거에 썼던 언어들이 자신의 내면에서 숙성돼 나오는 것이다. 과거에 썼던 언어의 저장고가 취약한 사람은 그 언어의 저장고를 채우는 일을 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대통령의 언어는 자신의 언어가 아닌 것이다.
글이 헛도는 시대다. 미사여구는 넘쳐나지만 세상의 가슴을 두드리는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때로는 글은 의심과 경멸의 눈초리까지 받고는 한다. 하지만 고도원 작가는 글의 힘을 믿는다. 그에게 글은 곧 업(業)이고 생(生)이다.
가난한 집의 지붕에서 새는 비를 치우던 어머니의 모습을 글로 담아냈던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그는 이미 글쟁이였다. 의협심 넘치던 청년 시절에는 세상을 향해 펜을 겨눴고, 한때는 시대의 정신인 대통령의 연설문을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벌써 15년째 매일 아침 그는 350만 명의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다. 「고도원의 아침편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메일이나 SNS를 통해 전해지는 이 편지는 많은 이들에게 위안과 응원의 메시지가 돼 글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긴급조치 9호 : 75년 5월 선포. 유신헌법의 부정·반대·왜곡·비방·개정 및 폐기의 주장이나 청원·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행위를 일절 금지하고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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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지성 기자 speedboy25@yonsei.ac.kr
사진 이청파 기자leechungpa@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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